2019 10 보그 코리아 - 서촌유희


수직으로 치솟은 건물이 아닌, 마을 전체가 호텔이 된다면?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에서 밥(빌 머레이)과 샬롯(스칼렛 요한슨)은 파크 하얏트 도쿄에 머문다. 밥은 일본에 광고를 찍으러 왔는데 현장 통역은 처참한 수준이다. 남편을 따라 일본에 온 샬롯 역시 말이 통하지 않는 낯선 곳에서 공허하고 외롭다(영화의 원제는 ‘Lost in Translation’). 소피아 코폴라 감독은 파크 하얏트 도쿄를 배경으로 선택했다. 호텔은 고급스럽고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지만, 두 주인공을 철저히 이방인으로 놔두기 때문이다.

내게 글로벌 체인 호텔은 그런 이미지다. 배낭여행자로 머물던 게스트하우스, 에어비앤비가 주는 생동과 긴장이 거세된 채 흠잡을 데 없이 편리하지만 무색무취인 공간. 호텔은 수직 엘리베이터로 오르내리거나 프런트에 전화를 걸면 숙식에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이 해결된다. 고도성장의 시대가 그랬듯 효율적 수직 공간이다. 하지만 세계 어디에 묵든 호텔 안은 비슷비슷하다. 무국적이다. 대안처럼 한때 작지만 현란한 부티크 호텔이 유행했고, 홍대 인근의 L7이나 중구의 레스케이프, 여러 에이스 호텔처럼 번쩍이는 힙스터도 환영받았다. 몇 년 사이 지역과 소통하려는 호텔이 등장했다. 로비에는 지역 아티스트의 전시가 열려 투숙객이 아닌 관람객도 북적이고, 지역 셰프가 쿠킹 클래스를 연다. 대나무가 많이 나오는 지역은 지역 건축가를 고용해 대나무 호텔을 짓고 환경 콘텐츠를 가져간다.

그러다 건축가 정재헌에게 수평적 호텔 얘기를 들었다. “대도시 호텔은 지가가 높고 고밀 개발 안에 완성되어야 하기에 수직적 엘리베이터가 객실을 연결할 수밖에 없죠. 하지만 ‘수평적 호텔’은 골목이 엘리베이터가 되고, 동네의 카페와 음식점이 호텔의 F&B가 됩니다. 마을 전체가 호텔인 거죠.”

일본의 하나레(Hanare) 호텔이 그러하다. 컨셉은 ‘The Whole Town = Your Hotel’이다. 호텔은 마을의 오래된 집을 개조했고, 호텔 내 사우나가 없는 대신 동네 목욕탕 이용권을 주고, 레스토랑이 입점하는 대신 동네 맛집 지도를 준다. 자전거 대여소를 알려주어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탐방하길 권한다. 웹사이트에는 전통문화 체험 공간, 목욕탕, 식당 등을 동그라미로 묶어 호텔로 소개한다. 이 호텔은 세계에 하나뿐이다. 이 동네가 하나뿐이니까. 투숙객은 이곳에 머물며 동네를 탐방할 뿐 아니라 주민과 소통하며 일반 호텔이 줄 수 없는 경험을 한다. 정재헌은 “백화점처럼 모든 것을 갖춘 호텔이 아니라, 골목길의 로드숍처럼 네트워크가 유기적으로 연결된 형태여야 그 지역의 진짜 여행이 시작된다”고 말한다.


http://www.vogue.co.kr/2019/10/24/수평적-호텔/